대학사계

[*이 글은 오래 전 스승의 날에 쓴 글입니다. 물론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였던 시절]

나는 오월을 좋아한다. 하루만 빼고. 그날이 오늘 스승의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도 내 마음처럼 흐려 있다. 학교에 가기 싫다. 잠을 설쳐 부은 눈을 무겁게 뜨고 캠퍼스에 들어온다. 작년, 재작년, 그 전해의 오늘... 늘 같은 모습이다. 꽃을 든 학생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학생들에게 선물이나 바라는 쫀쫀한 교수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데 오늘 같은 날은 기대가 없을 수 없다. 큰 것이 아니라 그저 소박한 장미 한 송이라도 받으면 마음이 들뜰 것 같다. 그러나 올해도 내 방문 앞은 쓸쓸하다. 꽃은 아니라도 갈아먹은 배 한 깡통이라도 받아보았으면...

옆 방들을 보면 난리도 아니다. 몇 만원쯤 돼보이는 꽃바구니에 각종 선물 꾸러미가 넘쳐흐르는 곳도 있다. 특히 학생들 장래에 영향이라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무슨 학과장 같은 자리라도 하는 교수 방은 더하다. 아니, 나도 얼마 전 2년 가까이 학과장을 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까? 어떤 교수는 방이 비좁은지 큰 화분을 복도에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남은 커피를 버리기도 했다. 물론 거름이 되라고.

나는 이 설움을 한번 강의 시간에 넌지시 얘기하기도 했었다. "왜 나는 인기가 없는지 몰라?" 학생들의 대답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선생님은 너무 인기가 많아 꽃이 넘쳐흐를것 같아 안 찾아가요..." 너무한다. 차라리 “선생님의 이런 점이 싫어요”라고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몇 해 전 스승의 날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는데 인기 있는 선생님의 5가지 유형에 관한 학생들의 서베이 결과가 흘러나왔다. 5위부터 나오는데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나를 모델로 하다시피 한 것이 아닌가! ’맛있는 것 많이 사주시는 선생님" "수업 중 재미있는 얘기 많이 해주는..." "항상 젊게 사시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 시원하게 잘 짚어주시는 선생님" 등 5위에서 2위까지의 경우 나를 따라올 교수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리고 마지막 제1위. "차별하지 않는 선생님" 이 부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과연 나는 이 유형에 해당될까? 부끄럽지만 여기에서는 최고라고 주장하기 힘들었다. 솔직이 남들보다 못하지 않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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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들어 소득분배나 계층 간의 갈등에 관한 글을 많이 쓴다. 아마 경제 위기 이후 못사는 계층을 대변하는 시론을 나만큼 많이 쓴 사람도 드물 것이다. 요란한 시민운동가도 아닌 내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소득분배의 악화가 가져오는 정치적 불안정이 장기적으로는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직관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인위적인 재분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준의 소득분배는 유지되어야 한다. 없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 있는 계층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되어야지, 모두들 손을 놓고 가진 자들을 도둑놈이라고 욕한다면 경제는 제 살 까먹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나락의 길로 향할 것이다. 

흔히 소득재분배를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고 가난한 계층을 위한 복지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계층 간 소득 격차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최선의 소득재분배는 계층 간 수직 이동을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육은 없는 집안의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 사회에 나가 신분상승을 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옛날에는 시골학교 출신이라도 똑똑하기만 하면 학교 공부만으로 서울의 명문대에 갈 수 있었다. 나아가 고시를 패스하거나 의대를 가면 부잣집 사위로 간택되기도 하였다. 교육이 신분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교육은 어떤가. 해마다 바뀌는 입시제도 때문에 순발력 없는 학교 교육에만 의지해서는 대학 문턱을 밟기가 쉽지 않다.

요령을 가르치는 과외는 대학입시의 필수재가 되었고, 돈 없는 집안의 자식들에게 명문대학의 문은 더욱 좁아졌다. 논술도 과외를 받는 세상이니 더 무슨 얘기를 하랴. 미국 흉내들 내느라고 내신의 비중을 높이니 뭐니 하지만, 자원봉사까지 빽써서 하는 세상인데 이런 주관성이 개입되기 쉬운 제도가 가진 계층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한마디로 교육을 통해 소득재분배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좁아진 것이다. 똑똑한 하면 상위계층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학생이나 선생, 그리고 학부모들까지 사람은 똑 같은 데 제도나 환경의 변화가 사회정의를 흔들고 있다. 이 퇴보의 여로 한가운데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정책 당국의 무능과, 교육을 정치적 이해관계의 볼모로 삼으려는 정치세력들의 독선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그래도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학교 교실이다. 교실 안에서는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서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간에도 간격이 존재한다. 능력이 뛰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을 더 이뻐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실은 사회가 아니다. 다소 능력이 모자라는 학생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는 "애정의 소득재분배" 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장소다.

스승의 날... 내가 "차별하지 않는 선생"인가를 생각해본다. 사회의 소득재분배는 교실에서 시작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한 두명 수재의 그늘에 가린 대다수 보통 아이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눈길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보다 진정한 길임을 우리는 왜 모르는가! 

하루가 저물고 오월의 초록이 저녁 어스름에 잠겨온다. 여전히 내 방문 앞은 쓸쓸하다. 아마 나의 속마음은 지금도 ’장미꽃의 재분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00년 스승의 날)

[*이 글은 약간의 픽션적 요소를 가미한 에세이입니다. 제가 정말 뭘 받기를 원해서/받지를 못해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 아니라는 것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어 걱정. 해마다 제 방 조교들 옆구리 찔러 꽃 한 송이 받습니다. 물론 그날 저녁에 한판 쏘느라고 ’되로 받고 말로 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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